040608_공주
공산성(公山城)
▲금서루
▲금서루
▲성벽 위
▲전망대
▲공산성에서 본 금강너머 공주
▲만하루
▲강건너에서 본 만하루
▲죽은사람이 나가는 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연지와 만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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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연지(公山城 蓮池) - 도지정 기념물 제42호
이곳은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靈隱寺)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雙樹亭) 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영은사
▲원통전
▲길
▲금강의 옛다리 유적
▲명국삼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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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倭)로 부터 보호 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明)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提督 李公), 위관 임제(委官 林濟), 유격장 남방위(遊擊將 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謝恩 頌德碑)로서
본래는 공주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 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는데,
일제(日帝)때 일인(日人)들이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이곳으로 이전 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宣祖) 37년(16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삼장비의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류각
▲나무
▲공사중인 공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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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拱北樓)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北門)으로 금강을 바로 통할 수 있는 이 문루는
옛 망북루(望北樓)자리에 선조(宣祖) 36 년(1603) 신축한 것으로
처음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졌으나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 문루(門樓)로 꼽히고 있다.
고주를 사용한 2층의 다락집 형태인 이 문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복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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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루(光復樓) - 문화재자료(유형) 제50호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광복루는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내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던 것을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일제초기에 이곳으로 옮겨 웅심각이라 불렀다.
이후 퇴락된 채로 남아 있다가 1945년 공주 주민이 합심하여 보수하였으며,
이듬해 4월 김구(金九), 이시영(李時榮) 선생이 이곳에 이르러
국권회복(國權回復)의 뜻을 기념하는 의미로 광복이라 하여 광복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 위에 고주를 올린 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시내
▲동문
▲토성의 흔적
▲동문
▲석성의 흔적
▲진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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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루(鎭南樓)- 문화재자료(유형) 제48호
공산성의 남문(南門)이며, 조선시대에 삼남(三南)의 주문(主門)이기도한 이 문은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석성(石城)으로 개축된 조선 초기에 세워진 문루로
1947년 장마로 유실되었던 것을 1949년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가 재건 하였으며,
지금의 문루는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이다.
문의 형태는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그 위에 장대석을 겹쳐 덮은 다음 문루를 건축한 것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문루의 남쪽 전방이 멀리까지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는 숲이 울창하게 어울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쌍수정 사적비
▲쌍수정 사적비
▲쌍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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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정(雙樹亭) - 문화재자료(유형) 제49호
쌍수정은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으로 일시 파천하여 머물렀던 장소였다.
그 당시 이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인조가 이 나무에 기대어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난(亂)이 평정(平定)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두 그루의 나무에 정 3품의 통훈대부(通訓大夫)를 하사 하였는데
이후 나무가 죽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영조 10년 관찰사 이 수항이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몇 번의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건물의 형태가 많이 손상되어
1970년에 전면 해체하고 새로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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