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일 수요일

만들어진 현실_박상훈 지음_후마니타스

 

 

2010년 08월 16일 읽기 시작.

이 책은 언제 다 읽을 건지.

이 책을 사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집에 왔는데,

'만들어진 신' 이라는 다른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2010년 09월 01일 다 읽음.

트위터에서 오늘이 고 노무현 대통령 생일이었다고 한다.

지역주의가 지역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 권위주의 의해서 내려온 측면이 크다는 것.

 

 

실제의 역사보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 딸라서 역사는 과거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특정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재의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럴 때 특정 방향의 의미 구조를 담고 있는 편향성 내지 편견은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옛날부터 그랬다는 생각이나 전통이라는 것도 잘 따져 보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작위적으로 창조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론들이지만, 한국 지역주의의 사례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쪽

 

 

"인간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실을 인식한다" 라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실이란 인간의 인식 세계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사실 이전에 사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둘러싼 투쟁이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풀어 말할 수 있겠는데, 헤게모니라는 그람시 개념의 독창성은 이런 인식론에 따른 것이다.

24쪽

 

 

한국 정당체제의 구성적 특징이 이념적으로 협애하고, 보수 편향적인 엘리트 과두 체제로 나타날 때, 정당 간 정치 경쟁이 사회 균열에 의해 제약되기보다 국가권력의 소유권 그 자체를 둘러싼 단차원적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116쪽

 

 

오래전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라고 하는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중남미 정치에서 사회운동이 가진 특징을 "국면에서는 강하나 전략적으로는 취약하다" 라는 말로 정의했는데, 필자는 이 말이 한국 정치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역시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특정 국면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실현할 수 있을 듯이 강렬하게 터져 나오지만,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세력들의 영향력이 늘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국면을 지배하는 그러한 열정이 그간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제어해 온 결정적인 요인인 것을 분명하고, 그래서 더 더욱 열정의 동원을 이상화하는 주장이 많지만 그래도 이제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가 일상적인 시기에도 꾸준히 실천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체제를 움직이는 힘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더 많이 필요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도 좀 더 깊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열정의 휘발성을 보완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힘을 합치게 되고, 이상적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협력하고 노력하면서 의미를 찾게 되는데, 바로 그럴 때 인간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나날이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49쪽

 

 

 

 

2010년 8월 7일 토요일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 -'사회적 DNA'에 따르면 - 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렌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용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철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30100803195348&Section=04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_프레시안_김학찬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의 '육체' 라는 '황무지'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려는 영혼' 의 투쟁이다. 담욕의 미망을 버리고 저 '산꼭대기' 에까지 이르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진리' 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나그네 길이 인생이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 이라는 결과가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생노정에서 대대적인 상업 광고는 어둠이 내리 깔린, 저 아래에 남겨둔, 황무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닮았다.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

[삼성을 생각한다] "광고에 마취된 정신을 일깨울 때"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23133241&section=03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_장 자크 루소_서문문고

 

 

2010년 06월 16일 부터 읽음.

글자를 읽어도 머릿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2010년 08월 15일 다 읽음.

출근길 라디오청취,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트위터, 등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스스로 책을 좀 멀리한 것도 작용했다.

신문기사를 프린터해 놓고 읽지 않고 있는 것도 태반이다.

 

 

나를 흔드는 것은 나의 과격한 천성이며, 나를 가라앉히는 것은 나의 게으른 천성이다. 나는 현재 느끼고 있는 모든 충동에 지고 있다. 모든 충격은 나에게 격렬한, 그러나 짧은동안의 운동을 일으켜 준다. 충격이 완화되면 운동은 멈추고 나의 내부에 파급되어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성적으로 이렇게 태오난 사람에게는 운명이 던져 주는 어떠한 사건도, 사람들의 온갖 간책도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게 영속적인 고뇌를 느끼게 하려면 그 인상이 순간마다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짧은 동안의 중단도 나에게 나의 인식을 도로 찾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186~187쪽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진보' 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 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 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에서 무단발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04

 

 

메모_

마지막 부분이 간략하게 큰 그림을 쉽게 그려주는 것 같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화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하며 연대,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지만 개인화된 다음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으니.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에밀_장자크루소_책세상

 

 

2010년 05월 23일 부터 읽기 시작.

전주영화제에서 사온 책.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에서 루소의 관한 책이 두권.

바로 전 읽었던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에밀'

2010년 06월 15일 다 읽었다.

중간에 회사에서 준 '혼창통' 을 읽고,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개미집처럼 빽빽한 곳에 살게 되어 있지 않다. 대지에 흩어져 경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한데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더 타락하게 된다. 신체의 장애나 정신의 악덕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군집 생활에 가장 적합하지 못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양떼처럼 밀집해 산다면,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죽어버릴 것이다. 인간이 내쉬는 날숨은 다른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 이것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76쪽

 

그러나 인생의 순환을 통해 어린 시절의 약한 상태로 되돌아간,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노인을 보라. 노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도 모두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아무리 작은 변화도 그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노인은 세상이 고요한 상태로 지속되길 바란다.

근본적인 원인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무력함을 가진 노인과 아이 사이에 이토록 상이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런 차이가 노인과 아이의 육체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활동력의 원천은 양자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아이 속에서는 성장하는 반면에 노인 속에서는 소멸해간다. 아이에게서는 형성되고 있지만 노인에게선 파괴되어간다. 아이에게서는 삶을 향해 있지만, 노인에게서는 죽음을 향하고 있다. 노인의 쇠퇴하는 활동력은 그의 마음속으로 집중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활동력이 흘러 넘쳐 밖으로 뻗어나간다. 말하자면 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생명력이 충만함을 느낀다.

95쪽

 

메모_

삶에서의 무력함이 생각이 났다.

 

아이의 어휘를 가능한 한 제한하라. 자신의 관념보다 많은 낱말을 아는 것,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많이 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커다란 폐단이다. 나는 도시 사람들보다 농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농촌 사람들의 사전이 덜 펼쳐져 있다는 것,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어휘가 적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농촌 사람들은 많은 관념들을 갖고 있지만 않지만, 그 관념을 잘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110~111쪽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인간불평등기원론_장자크루소_책세상

 

2010년 05월 14일부터 읽음.

'걷기예찬' 을 통해서 처음 알았던 루소.

'산책'을 읽으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영화제에 가서 근처 교보문고에서 책을 한 권씩 사오는데,

올해의 책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과 '에밀'

책세상문고를 사온다.

2010년 05월 21일 고모네 가면서 기차안에서 다 읽었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와 사물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면서 인류의 본원적인 구조 속에서 초래했을 모든 변화 가운데 자연이 만든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의 본질에 관련되는 것과, 환경이나 인간의 진보가 인간의 원시 상태에 덧붙이거나 변화시킨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세월과 바다와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흉해져서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맹수처럼 변해버린 글라우코스Glaucus

33쪽 머리말

글라우코스_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보이오티아의 어부로 마법의 약초를 먹고 불사하게 되었으며, 바다에 들어가 선원들과 어부들을 보호하는 신이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 제10권에서 인간의 영혼이 체와 결합함으로써 형태가 바뀌어 이미 불멸의 본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비유할 때 글라우코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루소의 비유는 플라톤의 비유와 전혀 의미가 다르다. "혼은 그 어떤 나쁜 것에 의해서도, 그것이 그 특유의 것이든 또는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파멸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임이 명백하이.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지 않는 것일세......많은 것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복합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영원히 존속하기란 쉬운 게 아닐세. 혼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듯 말일세......혼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육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다른 나쁜 것들로 말미암아 훼손된 상태로 있는 걸 -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 - 보지 말고, 그것이 순수한 상태가 되었을 때는 어떤 것일지는 추론에 의해서 충분히 검토해야만 하네. 방금 우리는 혼과 관련해서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으로 보이는지를 진실 그대로 말했던 걸세. 그렇지만 우리는 혼이 마치 이런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것 본 셈일세. 말하자면 이제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를 보는 사람들이 그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을 걸세. 그건 그의 옛날 육신의 부분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일부는 부러지고 일부는 박살이 나 완전히 훼손된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것들이, 즉 따개비와 해초 그리고 돌들이 그에게 덧붙어 자라게 된 때문일세.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자기보다는 오히려 온갖 짐승을 닮아 보이게 되었는데, 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나쁜 것으로 말미암아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네" [플라톤, <<국가>>. 박종현 옮김(서광사, 1997), 645~646쪽을 참조하라].

 

메모_

주변상황이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간과할 수 없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문득 어른들이 얘기하던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학술 서적을 제쳐두고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38쪽

 

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우리의 식욕과 관능적 쾌락을 쉽사리 자극하고 만족 시킬 수 있는 재간, 부유한 사람들에게 변비를 일으킬 동,식물성 즙을 제공하여 소화 불량으로 괴롭히기 일쑤인 너무도 희귀한 음식들, 그나마 굶주리기 일쑤지만 경우에 따라 과식하게 마련인 가나나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먹을거리, 그리고 밤샘과 온갖 종류의 무절제, 온갖 정념의 과도한 흥분, 정신의 피로와 소모, 누구나 경험하며 그래서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형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여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56쪽,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제1부

 

메모_고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들게 된다. 고독이라는 말에 쉽사리 이끌린다.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정신은 상상력이 멈추자마자 언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74쪽

 

제1부를 다 읽고, 메모_

원시적 삶에서의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불평등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적다는 느낌.

자유롭고, 속박되어 있지 않고, 살아가기위해 최소한의 조건을 채워야 하니.

어찌보면 개개인의 능력은 현재의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생각. 육체적으로

집단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별로 이뤄진 삶에서의 불평등도 있기 힘들듯.

불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기반이 적다는 생각.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 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 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 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불평등의 마지막 단계로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 정부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정당한 제도에 가깝게 만들 때까지는 다른 모든 단계가 거기로 귀착된다.

130~131쪽, 제2부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도덕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와 같은 경향에서 선과 악에 대한 무관심이 생겨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나의 주베는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이 겉모습으로 귀착되어 명예나 우정이나 미덕, 때로는 악덕마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찾으니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가식적이 되어버렸는가도 내가 논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그처럼 많은 철학이나 인간애나 예절이나 고상한 격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제나 '우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물을 타인에게는 던지되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즉 미덕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만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나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모두 변화시키고 별질시키는 것을 오로지 사회의 정신과 사회가 낳은 불평등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139쪽, 제2부

 

메모_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스쳐간다.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산책 외_헨리 데이비드 소로_김완구 옮김_책세상

 

2010년 04월 28일부터 읽음.

몇달 전 우연히 책방에서 보게 된 책.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에 있었다.

2010년 05월 12일 다읽음.

책제목 '산책' 보다는 '야생사과' 가 더 재미있었다.

조금은 집요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풀어낸 글이다.

사과에대한 정보며,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소로보다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특히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의 파괴로 인한 가치 전도에도 직면해 있는 우리 시대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 혹은 진정한 실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다. 아마 소로가 그렇게 강조하는 야생 자연은 잘못된 문명에 의해 오염되거나 파괴되지 않은 이상적인 야생 자연 환경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무엇인가에 의해 오염되거나 파괴되지 않아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우리의 정신 혹은 정신 상태, 마음가짐, 태도 등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소로가 말하는 야생이란 그것이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간에 바로 그러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세상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 밝히고 그것을 찾아내는 일,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의 삶을 추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인것 같다. 소로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래의 삶은 야생 자연, 즉 진정한 삶의 모습을 찾기 위한 사유의 산책을 떠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태한 일상의 의식, 즉 상식이나 전통 같은 것을 벗어나 정신세계의 야생성을 찾아 여기저기 떠도는 사유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하다.

12~13쪽, 들어가는말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와 개혁을 조화시켰다.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예찬했다." 그리고 그들은 인습에서 자연으로의 복귀와 인위적인 복잡함으로부터 단순함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삼았고 또한 누구든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손으로 노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지식을 얻게 되는 경로로는 감각과 직관 두 가지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직관이 교육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은 공존하지만 정신의 실재는 물질의 실재를 넘어선다고 역설" 했다.

162쪽, 해제-야생 자연을 노래한 소로

2010년 4월 24일 토요일

북호텔_외젠다비_민음사

 

 

2010년 04월 19일부터 읽기 시작,

제목에 이끌려서 사게 된 책.

04월 28일 다 읽음

 

 

북호텔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 얘기들.

감정이입 없이 담백하게 얘기가 진행.

큰 느낌도 없지만, 재미가 없지도 않다.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게공선_고바야시 다키지 지음_양희진 옮김_문파랑

 

 

게공선_고바야시 다키지 지음_양희진 옮김_문파랑

2010년 03월 29일 월요일부터 읽음.

머리는 복잡하고 모든 것이 잘 읽히지는 않고,

열려진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책상위에 종이가 날라가는 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내 머릿속 그림.

 

2010년 04월 18일 다 읽음.

이번 주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060226_을숙도

060226
부산_을숙도

 

 


▲서울원표에서 바라본 부산까지의 거리
일을 끝내고 기차시각까지 많이 남아 광화문근처를 돌았다.
교보사거리의 중앙이 서울의 원표라고 하는데,
동아면세점앞에 상징적으로 원표를 만들어 우리나라 곳곳의 거리를 적어두었다.
부산까지 사백오십육킬로다.

 

 


▲서울역으로 걸어가는 길
평일의 낮일 경우 많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바쁠 것 같은 동네.
모두들 퇴근하고 토요일밤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왠지 모르게 나 혼자 이런 공간을 보고 있다는 것이 좋다.

 

 


▲부산 중앙동역
부산에 도착하였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이리저리 걸으면 시간을 보내었다.

 

 


▲중앙동역 지하복도
아마 오른쪽시계가 맞는 시간일거다.
오랜만에 정리해서인지 잘 생각도 안난다.

 

 


▲용두산전망대

 

 


▲부산근대박물관
부산에 올때마다 한 번은 가보고 싶은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오늘도 그냥 겉모습만 보고 지나간다.

 

 


▲낙동강하구둑
지하철을 타고 하단역에 내리면 바로 하구둑으로 이어져있다.
참 바람이 많이불고 힘들게 걸어간 것 같다.
중간중간 바람막이로 작용한 하구둑 건물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하구둑에서 바라본 낙동강 북쪽
서울의 한강보다 더 넓게 보였다.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강 옆으로 눈에 가리는 것이 없어

더 넓어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을숙도남단으로 가는길에 찍은 낙동강하구둑

 

 


▲을숙도남단으로 가는 길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뜨기 바로전 시간에 느낌이 좋다.

 

 


▲을숙도남단으로 가는 길

해는 뜬 것 같은데 날씨가 흐려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남쪽 갈대밭에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고기잡이배
기존에 생각하던 배와는 모습이 다르다. 물론 어떤 물고기를 잡기 편하게 저런 구조겠지만.

 

 


▲갈대밭
을숙도에 들어와 처음으로 본 같대 밭.
거친듯한 느낌 부드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갈대

 

 


▲나무위에 앉아 있는 새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보았다.

 

 


▲을숙도에서 바라본 부산 공단지대
을숙도 건너편으로는 부산 공단지대가 형성되어있다.
이른 시간부터 공장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머리를 풀어헤친 것 같은 나무
을숙도 남단은 예전 부산쓰레기매립지였다고한다.
지금은 더 이상 쓰레기매립지로 사용을 안하고

서울의 난지도 공원처럼 공원을 만드려고 하는 것 같다.
버려진 것을 모아 놓아서 인지 그곳에 있는 것들도 좀 사납고 거칠어 보인다.

 

 


▲을숙도남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갈대밭
전망대에서 나와서는 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아무도 없길래 그냥 넘어갔다.

 

 


▲갈대밭
을숙도의 갈대밭은 바다에 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그래도 그 모습들이 참 멋들어져 보였다.

 

 


▲갈대밭
두 개의 원형태의 갈대밭.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느낌이 좋다.

 

 


▲바다와 갈대밭

 

 


▲비행기
근처 김해공항이 있어 을숙도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소리는 크게 들린다.

 

 


▲새
새들도 많이 보인다. 철새도래지라고 하는데.
그 만큼의 느낌은 받지 못하였다.

 

 


▲하늘

 

 


▲내 모습
해는 금방 떠 버렸다.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 같다.

 

 


▲갈대
처음 보았던 갈대밭의 갈대

 

 

╋돌아 다닌 후
사진들을 정리한 지금이 을숙도를 다녀온지 5개월이 지난 후다.
나의 게으름에 이렇게 까지 늦게 정리하게 되어 실망감이 없지 않다.  

을숙도를 가게 된 것은 갈대와 철새도래지라는 얘기를 듣고 가게 되었다.
지난 순천때도 그렇고, 아직 정리를 하지 못하였지만 안산갈대공원도 그렇고....
갈대라는 식물에 점점 끌리는 것 같다.
꼿꼿이 서서 심한 바람앞에서는 유연한 모습 그리고 자연을 정화하는 모습까지...
을숙도의 갈대밭은 바다와 함께 이루어져 있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점점 해가 뜨기전인 그 시간이 좋다.
무엇인가 조밀해보이고 엄숙하고 날 편안하게 하는 것 같다.
그 시간에 사진을 찍으면 어디든 멋있게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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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4일 수요일

060101_강릉

060101

강릉

 

 

 


▲경포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바다

 처음으로 해맞이를 보러갔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연인

 

 


▲바다

 아직 해가 뜨기전이다. 하늘과 바다에 색깔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기도 하고 적막한 느낌이 든다.

 

 


▲파도에 씻겨 깨끗한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겼다.

 발자국을 남겨보았다. 왠지 그럴듯하게 보일 것 같았다. 역시나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나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다. 허위, 있게보이기...두려워서일까?

 

 


▲같이같던 재훈이

 공익을 하면서 만난 재훈이.
 늦은 저녁 할 일 없어 그냥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해뜨기시작하는 경포해수욕장

 해뜨기전에 하늘은 참으로 이쁘다.  

 지난 해 일산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차갑기도 하고 깊숙한 느낌, 진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일출을 보고 떠나는 자동차행렬

 어느정도 해가 뜬 이후로는 모두들 경포해수욕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끝없이 계속 이어져 갔다.

 

 


▲강릉시내

 월정사로 가기 전 시간이 남아 강릉시내를 돌았다.

 


▲진부로 가는길에 본 황태어장

 티브이로만 보던 곳을 직접 본다는 것은 정말 재미나는 일 같다.
 머물러서 보고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금방 지나쳐 버렸다. 그래서 자전거가 더 끌리기도 하지만...
 역시나 패달을 밟다보면 서기 싫어진다. 돌아다는데는 걷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진부로 가는 길에 찍은 바깥풍경

 느낌이 좋아서 찍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다.
 갇혀있는 듯...하나의 막이 있는 것이....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

 월정사를 구경하고 시간이 남아 상원사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걷는 도중 차를 잡아 올라갔다.
 나무들 속에 도로, 느낌이 좋고 그 길을 혼자 점령하고 있는 것 같아 더 좋다.

 

 


▲예전다리

 이쪽은 새로난 다리고, 건너편으로 예전에 다리가 있다.
 세월이 지남으로써의 드는 느낌이 좋다.

 

 


▲가지들만 있는 나무속에 푸르른 나무

 며칠전 보았던 와호장룡이 계속해서 생각난다.
 푸르른 나무들을 건너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지들만 있는 나무속에 푸르른 나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안에 바깥풍경을 찍음

 

 

╋돌아다닌 후

의식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주요사진은 찍지 않았다. 일출장면, 월정사, 상원사에서 바라본 풍경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남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느낌이 들지 않아 찍지 않은 것인지....
돌아와 사진들을 보니 그냥 기본적인 것은 찍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였나 생각이 들었다.

해뜨기전에 하늘은 점점 끌리는 것 같다.
그 파란느낌을 뭐라고 해야 하나. 차갑게 느껴지고 나를 안고 있다고 해야하나.
적막함 조용함이 좋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처음으로 가보았다.
월정사는 그 전에 말을 많이 들어보아 보면서는 그러나 보다 하였다.
상원사로 오르는 길 걷는 느낌이 좋았고 상원사에 올라 바라보는 오대산의 풍경도 좋았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상원사로 하여 오대산등반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의궤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월정사근처에 오대산사고가 있다고 한다.
그 때 입간판을 보았던 것 같은데,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언제나 다녀오면 드는 생각, 준비를 많이 하지도 않고 대충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무엇이 그리 빨리 빨리 하려하는지. 이 느낌이 언제쯤 사라질까?

 

╋배경소리

파도가 모래사장에 닫는 소리입니다.
초반에 욕이 나오는데 너무 추워서 나온 말입니다. 오해하지마세요.
후반부에는 같이 갔던 재훈이 목소리와 경포해수욕장에서의 공연소리가 살짝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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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2일 월요일

051204_순천_2

051204
순천_2

 

 

 


▲선암사를 나와 굴목재로 가는길에 조계산
 
조계산에는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다. 선암사는 태고종총본산이고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는 두가지길로 걸어갈 수 있다.

  산의 정상인 장군봉을 거쳐가는 것과 굴목재를 거쳐서 가는 것이다.
  눈이 오고 그닥 등산하는 차림새가 아니라 편히 갈 수 있는 굴목재로 가기로 하였다.

 

 


▲대나무숲
  선암사 굴목재초입이다.

 


▲선암사굴목재
 
선암사굴목재는 계단형태로 되어있어 오르기는 쉬웠다. 정돈이 되어있다고 해야하나....
  눈이 많이 내려 쌓인 눈을 밟고 다시금 털고 지루한 산행이었지만 밟는 느낌은 좋았다.

 

 


▲눈으로 덮힌 나무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원래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 줄 알았는데, 순천은 거의 눈이 오지 않는 지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눈꽃이라는 것을 실제로 처음 본 것 같다. 가지사이로 눈이 쌓여 꼭 꽃이 핀 것 처럼 보인다.

 

 


▲굴목재사이의 보리밥집,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인지 배도 고프고, 좋은 위치에 있다.
  굴목재를 통하여는 두 번 고개를 넘어야하는데 그 중간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앞에 보이는 가마솥에는 숭늉이 가득하다. 추운 몸을 달래주고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눈꽃


 

 


▲눈꽃
  처음으로 본 것 같다. 실제로 보지는 못하였지만 면화같기도 하다.
  이런 느낌으로 겨울산을 찾아오나 했다.

 

 


▲ 내 신발
 눈들이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바닥은 평평하게 변하는 것 같고, 바지 밑단은 얼어 버렸다.

 

 


▲송광사굴목재
 송광사쪽은 보통 산길과 비슷했다. 계단형태로 되어진 곳은 거의 없고 자연스럽게 되어져 있다.

 

 


▲송광사 뒷편 배추밭
  이제 송광사다. 대략 두시간 반정도 걸려 도착한 것 같다.

 

 


▲눈 쌓인 지붕, 조계산

 

 


▲송광사 일주문
  선암사의 일주문과 거의 흡사해 보인다.

 

 


▲우화각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이다리를 지나가야한다.
  선암사의 홍교와 비교 되어진다.
  같은 산에 있어서인지 서로 비교하면서 보면 좀 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사자루
  아담한 선암사에 비해 송광사는 웅장한 절이다.
  승보사찰이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낙안읍성
  송광사에서 순천으로 돌아와 시간이 남아 들려보았다.
  읍성이라는 곳에 생소하다.

 

 


▲읍성 내 초가집
 
 읍성안으로는 초가집들이 모여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고 있으며 민박도 제공하여준다.
  날도 저물어가고 눈도 와서 하루 머물고 싶었다.

 

 


▲읍성 내 풍경

 


▲낙안읍성
  읍성으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내려서 버스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돌아다니면서 두 번째로 경험하였는데....
  고립되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무섭다.

 

 


▲눈
 우연히 플래쉬를 터트리게 되었는데, 눈이 찍혔다.
 참 신기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

 

 


▲순천역
  서울로 올라가기전...
  참으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내리는 산을 오르고, 여러 가지를 보았다.
  여러 가지를 본만큼 내가 알지 못하여 느끼지 못한 부분,

  집중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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