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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7일 토요일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 -'사회적 DNA'에 따르면 - 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렌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용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철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30100803195348&Section=04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_프레시안_김학찬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의 '육체' 라는 '황무지'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려는 영혼' 의 투쟁이다. 담욕의 미망을 버리고 저 '산꼭대기' 에까지 이르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진리' 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나그네 길이 인생이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 이라는 결과가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생노정에서 대대적인 상업 광고는 어둠이 내리 깔린, 저 아래에 남겨둔, 황무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닮았다.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

[삼성을 생각한다] "광고에 마취된 정신을 일깨울 때"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23133241&section=03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진보' 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 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 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에서 무단발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04

 

 

메모_

마지막 부분이 간략하게 큰 그림을 쉽게 그려주는 것 같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화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하며 연대,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지만 개인화된 다음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으니.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쓰고 또 쓰라...시는 온몸이요 목숨이니' 기사 중_한겨레_090307_고명섭

 

시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상투성이다. 지은이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려 상투성이란 "어떤 마력도 어떤 열광도 없이 반복되는 단어"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상투성이라는 적을 제압한 자만이 시인의 왕국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 입장권을 얻으려고 분투하는 자는 이 세상을 낯설게 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해야 한다. 세계와 불화해야 한다. 이문재 시인이 스무 살 시절에 "우리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 고 털어놓은 것은 일상이 전쟁터였음을 증언하는 말이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본관 앞에서 막걸리에 도시락을 말아 먹었다. 글씨를 왼손으로 썼고, 담뱃갑을 거꾸로 뜯었다."

상투성과 싸우는 자는 관념어와 싸우는 자이기도 하다. 시의 나라에서 관념어는 죽은 말이다. 말의 주검에서는 삶이 나올 수 없다. 시는 몸을, 육질을 더듬고 탐하는 일이지, 추상세계를 고공비행하는 일이 아니다. 죽은 언어는 죽은 인식을 낳고, 진부한 말은 진부한 생각을 만든다. '애수'(유치환)도 '애증'(박인환)도 '견고한 고독'(김현승)도 시의 세계에선 사어다.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와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관념어만 시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감정의 과잉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감정을 쏟아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감정의 홍수가 넘실대는 곳이야말로 시의 금지구역이다. 넘쳐 흐르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차라리 시는 감정의 홍수에 떠밀려 익사 직전에 이른 자의 그 위태로움을 냉정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지은이는 가차 없이 말한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이 세상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마라. 유식한 척하지 마라." 이'척'이야말로 시의 독이다.

과잉 감정은 가짜 감정이다. 시쓰기는 가짜를, 껍데기를 뚫고 진짜 속으로,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시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 끝으로도 쓴다. 그러나 시는 가슴으로만 쓰는 것도 아니고 손 끝으로만 쓰는 것도 아니다. 지은이는 여기서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를 불러들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마침내 만나는 것이 '사랑' 이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지은이는 이 온몸의 시학, 온몸의 사랑을 두고 "시를 창작하는 일은 옴몸으로 하는 반성의 과정이며, 현재형의 사랑이며 고투" 라고 다시 새긴다. 이 온몸의 사랑에서 시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시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시는 삶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아, 당신도 시를 쓰라"

 

고명섭기자 michael@hani.co.kr

 

 

쓰고 또 쓰라...시는 온몸이요 목숨이니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

책소개 기사

한겨례_090307

 

 

 

 

옳음과 그름_한겨레_090609_함석진

 

[유레카] 옳음과 그름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실증하는 것이다. 인간은 직접 보고 들은 것만큼은 후하게 믿는다.이성적인 과학에서도 관찰은 가장 중요한 검증 도구의 하나다.

상업적 무선통신기를 최초로 발명한 마르코니는 1902년 무선 신호가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지 실험을 했다. 캐나다에 있던 그는 영국에서 쏜 모스신호 '에스'(S)자를 분명하게 들었다. 20년 뒤 지구를 싸고 있는 전리층이라는 게 발견됐다. 전리층에 반사된 전파는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마르코니의 주장을 확증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마르코니의 실험이 실패였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많은 과학자는 이제 이를 정설로 받아들인다. 당시 마르코니가  실험한 중간 파동의 신호는 전리층 반사를 통해 대서양을 건널 수 없었다. 그럼 들린 소리는 뭐였을까? 마르코니는 우연히 잡힌 잡음을 들었거나, 그렇게 상상했을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강박증을 느낀 그가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들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지과학의 설명대로 인간은 보고 들은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보고 듣는지 모르겠다.

심리학에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앞선 열 명의 실험 대상이 짜고서 엉뚱한 선택을 했다면, 이를 본 열한 번째 사람은 역시 그 선택을 따라갈 확률리 높다. 실제로 그렇게 믿으며, 인간 이성의 한자락, 믿음의 실체는 때론 그렇게 허약하다.

국가의 리더는 침묵하고, 많은 국민은 또 갈렸다. 극단에 서 있는 이들을 빼고도, 우리 곁의 진보와 보수는 이렇게 끝까지 평행선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옳음과 그름의 차이는 무엇일까? <장자>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시비를 어떻게 가를 수 있단 말인가? 보되 본것이 아니고, 듣되 들은 것이 아닐진대, 하물며 말로 말을 가릴 수 있겠는가?" 시비를 초월한 큰 나무 같은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