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진보' 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 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 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에서 무단발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04

 

 

메모_

마지막 부분이 간략하게 큰 그림을 쉽게 그려주는 것 같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화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하며 연대,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지만 개인화된 다음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으니.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