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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14일부터 읽음.
'걷기예찬' 을 통해서 처음 알았던 루소.
'산책'을 읽으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영화제에 가서 근처 교보문고에서 책을 한 권씩 사오는데,
올해의 책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과 '에밀'
책세상문고를 사온다.
2010년 05월 21일 고모네 가면서 기차안에서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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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와 사물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면서 인류의 본원적인 구조 속에서 초래했을 모든 변화 가운데 자연이 만든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의 본질에 관련되는 것과, 환경이나 인간의 진보가 인간의 원시 상태에 덧붙이거나 변화시킨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세월과 바다와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흉해져서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맹수처럼 변해버린 글라우코스Glaucus
33쪽 머리말
글라우코스_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보이오티아의 어부로 마법의 약초를 먹고 불사하게 되었으며, 바다에 들어가 선원들과 어부들을 보호하는 신이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 제10권에서 인간의 영혼이 체와 결합함으로써 형태가 바뀌어 이미 불멸의 본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비유할 때 글라우코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루소의 비유는 플라톤의 비유와 전혀 의미가 다르다. "혼은 그 어떤 나쁜 것에 의해서도, 그것이 그 특유의 것이든 또는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파멸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임이 명백하이.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지 않는 것일세......많은 것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복합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영원히 존속하기란 쉬운 게 아닐세. 혼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듯 말일세......혼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육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다른 나쁜 것들로 말미암아 훼손된 상태로 있는 걸 -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 - 보지 말고, 그것이 순수한 상태가 되었을 때는 어떤 것일지는 추론에 의해서 충분히 검토해야만 하네. 방금 우리는 혼과 관련해서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으로 보이는지를 진실 그대로 말했던 걸세. 그렇지만 우리는 혼이 마치 이런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것 본 셈일세. 말하자면 이제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를 보는 사람들이 그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을 걸세. 그건 그의 옛날 육신의 부분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일부는 부러지고 일부는 박살이 나 완전히 훼손된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것들이, 즉 따개비와 해초 그리고 돌들이 그에게 덧붙어 자라게 된 때문일세.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자기보다는 오히려 온갖 짐승을 닮아 보이게 되었는데, 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나쁜 것으로 말미암아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네" [플라톤, <<국가>>. 박종현 옮김(서광사, 1997), 645~646쪽을 참조하라].
메모_
주변상황이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간과할 수 없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문득 어른들이 얘기하던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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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서적을 제쳐두고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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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우리의 식욕과 관능적 쾌락을 쉽사리 자극하고 만족 시킬 수 있는 재간, 부유한 사람들에게 변비를 일으킬 동,식물성 즙을 제공하여 소화 불량으로 괴롭히기 일쑤인 너무도 희귀한 음식들, 그나마 굶주리기 일쑤지만 경우에 따라 과식하게 마련인 가나나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먹을거리, 그리고 밤샘과 온갖 종류의 무절제, 온갖 정념의 과도한 흥분, 정신의 피로와 소모, 누구나 경험하며 그래서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형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여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56쪽,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제1부
메모_고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들게 된다. 고독이라는 말에 쉽사리 이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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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정신은 상상력이 멈추자마자 언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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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를 다 읽고, 메모_
원시적 삶에서의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불평등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적다는 느낌.
자유롭고, 속박되어 있지 않고, 살아가기위해 최소한의 조건을 채워야 하니.
어찌보면 개개인의 능력은 현재의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생각. 육체적으로
집단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별로 이뤄진 삶에서의 불평등도 있기 힘들듯.
불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기반이 적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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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 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 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 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불평등의 마지막 단계로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 정부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정당한 제도에 가깝게 만들 때까지는 다른 모든 단계가 거기로 귀착된다.
130~131쪽,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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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도덕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와 같은 경향에서 선과 악에 대한 무관심이 생겨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나의 주베는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이 겉모습으로 귀착되어 명예나 우정이나 미덕, 때로는 악덕마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찾으니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가식적이 되어버렸는가도 내가 논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그처럼 많은 철학이나 인간애나 예절이나 고상한 격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제나 '우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물을 타인에게는 던지되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즉 미덕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만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나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모두 변화시키고 별질시키는 것을 오로지 사회의 정신과 사회가 낳은 불평등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139쪽, 제2부
메모_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