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일 수요일

만들어진 현실_박상훈 지음_후마니타스

 

 

2010년 08월 16일 읽기 시작.

이 책은 언제 다 읽을 건지.

이 책을 사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집에 왔는데,

'만들어진 신' 이라는 다른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2010년 09월 01일 다 읽음.

트위터에서 오늘이 고 노무현 대통령 생일이었다고 한다.

지역주의가 지역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 권위주의 의해서 내려온 측면이 크다는 것.

 

 

실제의 역사보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 딸라서 역사는 과거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특정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재의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럴 때 특정 방향의 의미 구조를 담고 있는 편향성 내지 편견은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옛날부터 그랬다는 생각이나 전통이라는 것도 잘 따져 보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작위적으로 창조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론들이지만, 한국 지역주의의 사례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쪽

 

 

"인간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실을 인식한다" 라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실이란 인간의 인식 세계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사실 이전에 사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둘러싼 투쟁이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풀어 말할 수 있겠는데, 헤게모니라는 그람시 개념의 독창성은 이런 인식론에 따른 것이다.

24쪽

 

 

한국 정당체제의 구성적 특징이 이념적으로 협애하고, 보수 편향적인 엘리트 과두 체제로 나타날 때, 정당 간 정치 경쟁이 사회 균열에 의해 제약되기보다 국가권력의 소유권 그 자체를 둘러싼 단차원적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116쪽

 

 

오래전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라고 하는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중남미 정치에서 사회운동이 가진 특징을 "국면에서는 강하나 전략적으로는 취약하다" 라는 말로 정의했는데, 필자는 이 말이 한국 정치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역시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특정 국면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실현할 수 있을 듯이 강렬하게 터져 나오지만,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세력들의 영향력이 늘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국면을 지배하는 그러한 열정이 그간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제어해 온 결정적인 요인인 것을 분명하고, 그래서 더 더욱 열정의 동원을 이상화하는 주장이 많지만 그래도 이제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가 일상적인 시기에도 꾸준히 실천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체제를 움직이는 힘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더 많이 필요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도 좀 더 깊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열정의 휘발성을 보완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힘을 합치게 되고, 이상적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협력하고 노력하면서 의미를 찾게 되는데, 바로 그럴 때 인간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나날이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49쪽

 

 

 

 

2010년 8월 7일 토요일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 -'사회적 DNA'에 따르면 - 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렌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용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철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_프레시안_강수돌교수 인터뷰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30100803195348&Section=04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_프레시안_김학찬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의 '육체' 라는 '황무지'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려는 영혼' 의 투쟁이다. 담욕의 미망을 버리고 저 '산꼭대기' 에까지 이르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진리' 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나그네 길이 인생이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 이라는 결과가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생노정에서 대대적인 상업 광고는 어둠이 내리 깔린, 저 아래에 남겨둔, 황무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닮았다.

 

 

"답은 '정치의 회복' 이다"

[삼성을 생각한다] "광고에 마취된 정신을 일깨울 때"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23133241&section=03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_장 자크 루소_서문문고

 

 

2010년 06월 16일 부터 읽음.

글자를 읽어도 머릿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2010년 08월 15일 다 읽음.

출근길 라디오청취,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트위터, 등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스스로 책을 좀 멀리한 것도 작용했다.

신문기사를 프린터해 놓고 읽지 않고 있는 것도 태반이다.

 

 

나를 흔드는 것은 나의 과격한 천성이며, 나를 가라앉히는 것은 나의 게으른 천성이다. 나는 현재 느끼고 있는 모든 충동에 지고 있다. 모든 충격은 나에게 격렬한, 그러나 짧은동안의 운동을 일으켜 준다. 충격이 완화되면 운동은 멈추고 나의 내부에 파급되어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성적으로 이렇게 태오난 사람에게는 운명이 던져 주는 어떠한 사건도, 사람들의 온갖 간책도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게 영속적인 고뇌를 느끼게 하려면 그 인상이 순간마다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짧은 동안의 중단도 나에게 나의 인식을 도로 찾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186~187쪽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진보' 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 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 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에서 무단발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04

 

 

메모_

마지막 부분이 간략하게 큰 그림을 쉽게 그려주는 것 같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화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하며 연대,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지만 개인화된 다음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으니.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에밀_장자크루소_책세상

 

 

2010년 05월 23일 부터 읽기 시작.

전주영화제에서 사온 책.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에서 루소의 관한 책이 두권.

바로 전 읽었던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에밀'

2010년 06월 15일 다 읽었다.

중간에 회사에서 준 '혼창통' 을 읽고,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개미집처럼 빽빽한 곳에 살게 되어 있지 않다. 대지에 흩어져 경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한데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더 타락하게 된다. 신체의 장애나 정신의 악덕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군집 생활에 가장 적합하지 못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양떼처럼 밀집해 산다면,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죽어버릴 것이다. 인간이 내쉬는 날숨은 다른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 이것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76쪽

 

그러나 인생의 순환을 통해 어린 시절의 약한 상태로 되돌아간,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노인을 보라. 노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도 모두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아무리 작은 변화도 그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노인은 세상이 고요한 상태로 지속되길 바란다.

근본적인 원인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무력함을 가진 노인과 아이 사이에 이토록 상이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런 차이가 노인과 아이의 육체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활동력의 원천은 양자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아이 속에서는 성장하는 반면에 노인 속에서는 소멸해간다. 아이에게서는 형성되고 있지만 노인에게선 파괴되어간다. 아이에게서는 삶을 향해 있지만, 노인에게서는 죽음을 향하고 있다. 노인의 쇠퇴하는 활동력은 그의 마음속으로 집중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활동력이 흘러 넘쳐 밖으로 뻗어나간다. 말하자면 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생명력이 충만함을 느낀다.

95쪽

 

메모_

삶에서의 무력함이 생각이 났다.

 

아이의 어휘를 가능한 한 제한하라. 자신의 관념보다 많은 낱말을 아는 것,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많이 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커다란 폐단이다. 나는 도시 사람들보다 농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농촌 사람들의 사전이 덜 펼쳐져 있다는 것,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어휘가 적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농촌 사람들은 많은 관념들을 갖고 있지만 않지만, 그 관념을 잘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110~111쪽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인간불평등기원론_장자크루소_책세상

 

2010년 05월 14일부터 읽음.

'걷기예찬' 을 통해서 처음 알았던 루소.

'산책'을 읽으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영화제에 가서 근처 교보문고에서 책을 한 권씩 사오는데,

올해의 책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과 '에밀'

책세상문고를 사온다.

2010년 05월 21일 고모네 가면서 기차안에서 다 읽었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와 사물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면서 인류의 본원적인 구조 속에서 초래했을 모든 변화 가운데 자연이 만든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의 본질에 관련되는 것과, 환경이나 인간의 진보가 인간의 원시 상태에 덧붙이거나 변화시킨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세월과 바다와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흉해져서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맹수처럼 변해버린 글라우코스Glaucus

33쪽 머리말

글라우코스_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보이오티아의 어부로 마법의 약초를 먹고 불사하게 되었으며, 바다에 들어가 선원들과 어부들을 보호하는 신이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 제10권에서 인간의 영혼이 체와 결합함으로써 형태가 바뀌어 이미 불멸의 본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비유할 때 글라우코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루소의 비유는 플라톤의 비유와 전혀 의미가 다르다. "혼은 그 어떤 나쁜 것에 의해서도, 그것이 그 특유의 것이든 또는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파멸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임이 명백하이.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지 않는 것일세......많은 것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복합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영원히 존속하기란 쉬운 게 아닐세. 혼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듯 말일세......혼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육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다른 나쁜 것들로 말미암아 훼손된 상태로 있는 걸 -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 - 보지 말고, 그것이 순수한 상태가 되었을 때는 어떤 것일지는 추론에 의해서 충분히 검토해야만 하네. 방금 우리는 혼과 관련해서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으로 보이는지를 진실 그대로 말했던 걸세. 그렇지만 우리는 혼이 마치 이런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것 본 셈일세. 말하자면 이제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를 보는 사람들이 그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을 걸세. 그건 그의 옛날 육신의 부분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일부는 부러지고 일부는 박살이 나 완전히 훼손된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것들이, 즉 따개비와 해초 그리고 돌들이 그에게 덧붙어 자라게 된 때문일세.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자기보다는 오히려 온갖 짐승을 닮아 보이게 되었는데, 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나쁜 것으로 말미암아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네" [플라톤, <<국가>>. 박종현 옮김(서광사, 1997), 645~646쪽을 참조하라].

 

메모_

주변상황이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간과할 수 없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문득 어른들이 얘기하던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학술 서적을 제쳐두고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38쪽

 

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우리의 식욕과 관능적 쾌락을 쉽사리 자극하고 만족 시킬 수 있는 재간, 부유한 사람들에게 변비를 일으킬 동,식물성 즙을 제공하여 소화 불량으로 괴롭히기 일쑤인 너무도 희귀한 음식들, 그나마 굶주리기 일쑤지만 경우에 따라 과식하게 마련인 가나나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먹을거리, 그리고 밤샘과 온갖 종류의 무절제, 온갖 정념의 과도한 흥분, 정신의 피로와 소모, 누구나 경험하며 그래서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형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여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56쪽,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제1부

 

메모_고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들게 된다. 고독이라는 말에 쉽사리 이끌린다.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정신은 상상력이 멈추자마자 언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74쪽

 

제1부를 다 읽고, 메모_

원시적 삶에서의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불평등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적다는 느낌.

자유롭고, 속박되어 있지 않고, 살아가기위해 최소한의 조건을 채워야 하니.

어찌보면 개개인의 능력은 현재의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생각. 육체적으로

집단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별로 이뤄진 삶에서의 불평등도 있기 힘들듯.

불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기반이 적다는 생각.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 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 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 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불평등의 마지막 단계로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 정부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정당한 제도에 가깝게 만들 때까지는 다른 모든 단계가 거기로 귀착된다.

130~131쪽, 제2부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도덕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와 같은 경향에서 선과 악에 대한 무관심이 생겨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나의 주베는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이 겉모습으로 귀착되어 명예나 우정이나 미덕, 때로는 악덕마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찾으니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가식적이 되어버렸는가도 내가 논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그처럼 많은 철학이나 인간애나 예절이나 고상한 격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제나 '우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물을 타인에게는 던지되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즉 미덕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만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나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모두 변화시키고 별질시키는 것을 오로지 사회의 정신과 사회가 낳은 불평등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139쪽, 제2부

 

메모_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