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7일 목요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_장 자크 루소_서문문고

 

 

2010년 06월 16일 부터 읽음.

글자를 읽어도 머릿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2010년 08월 15일 다 읽음.

출근길 라디오청취,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트위터, 등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스스로 책을 좀 멀리한 것도 작용했다.

신문기사를 프린터해 놓고 읽지 않고 있는 것도 태반이다.

 

 

나를 흔드는 것은 나의 과격한 천성이며, 나를 가라앉히는 것은 나의 게으른 천성이다. 나는 현재 느끼고 있는 모든 충동에 지고 있다. 모든 충격은 나에게 격렬한, 그러나 짧은동안의 운동을 일으켜 준다. 충격이 완화되면 운동은 멈추고 나의 내부에 파급되어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성적으로 이렇게 태오난 사람에게는 운명이 던져 주는 어떠한 사건도, 사람들의 온갖 간책도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게 영속적인 고뇌를 느끼게 하려면 그 인상이 순간마다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짧은 동안의 중단도 나에게 나의 인식을 도로 찾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186~187쪽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그런데 이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하는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간 복지 자본주의 황금기이었고 둘째 '미래,진보' 에 대한 대중적 열의이었어요. 자본주의도 자연스럽게 성장돼갔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서로 연대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도 자연스러웠어요.

 

이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건 1980~90년대에요. 성장은 둔화됐고 완전고용은 깨졌고 연대 대신에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개인 경쟁' 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미래보다 개인적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은 우선시되기 시작됐어요.

 

그리고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죠. 대신에 오는 것은 개인의 끝이 없는 불안과 소외를 잠재울 수 있는 각종 '마취제' 들입니다.

 

잘되면 요가 정도고, 못되면 옴진리교 정도지만, 결국 그렇다고 해서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아요. 원자화된 개인은 매일 절에 가서 명상하든 웰빙으로 백세 살든 파도가 높은 바다에 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기 때문에요.

 

결국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성의 위기죠.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어요. 그리고 사회의 재건은 정치적인 진보, 즉 사회주의적 정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치 자체에 대해서 별로 재미를 안느끼면서도 - 진보신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에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_레디앙_박노자 에서 무단발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04

 

 

메모_

마지막 부분이 간략하게 큰 그림을 쉽게 그려주는 것 같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화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하며 연대,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지만 개인화된 다음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으니.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에밀_장자크루소_책세상

 

 

2010년 05월 23일 부터 읽기 시작.

전주영화제에서 사온 책.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에서 루소의 관한 책이 두권.

바로 전 읽었던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에밀'

2010년 06월 15일 다 읽었다.

중간에 회사에서 준 '혼창통' 을 읽고,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개미집처럼 빽빽한 곳에 살게 되어 있지 않다. 대지에 흩어져 경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한데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더 타락하게 된다. 신체의 장애나 정신의 악덕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군집 생활에 가장 적합하지 못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양떼처럼 밀집해 산다면,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죽어버릴 것이다. 인간이 내쉬는 날숨은 다른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 이것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76쪽

 

그러나 인생의 순환을 통해 어린 시절의 약한 상태로 되돌아간,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노인을 보라. 노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도 모두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아무리 작은 변화도 그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노인은 세상이 고요한 상태로 지속되길 바란다.

근본적인 원인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정념과 똑같은 무력함을 가진 노인과 아이 사이에 이토록 상이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런 차이가 노인과 아이의 육체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활동력의 원천은 양자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아이 속에서는 성장하는 반면에 노인 속에서는 소멸해간다. 아이에게서는 형성되고 있지만 노인에게선 파괴되어간다. 아이에게서는 삶을 향해 있지만, 노인에게서는 죽음을 향하고 있다. 노인의 쇠퇴하는 활동력은 그의 마음속으로 집중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활동력이 흘러 넘쳐 밖으로 뻗어나간다. 말하자면 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생명력이 충만함을 느낀다.

95쪽

 

메모_

삶에서의 무력함이 생각이 났다.

 

아이의 어휘를 가능한 한 제한하라. 자신의 관념보다 많은 낱말을 아는 것,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많이 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커다란 폐단이다. 나는 도시 사람들보다 농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농촌 사람들의 사전이 덜 펼쳐져 있다는 것,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어휘가 적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농촌 사람들은 많은 관념들을 갖고 있지만 않지만, 그 관념을 잘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110~111쪽